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M1 카빈 (문단 편집) == 역사 == 1938년 [[미 육군]] 병기과(Ordnance Department)에서는 지난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전훈을 바탕으로 일반 소총과 기관단총 사이에 위치한 경량 소총(Light Rifle) 도입 사업을 제안한 것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대규모 수요가 발생함에 따라 1940년 9월에 윈체스터 사가 .32 WSL를 기반으로 탄약([[7.62mm|7.62mm/.30 카빈]])을 개발하고, 9개 업체에서 총기 개발에 참여하였다. * 상용화된 .32 WSL과 유사한 7.62×33mm 규격의 .30 카빈 탄약을 사용할 것. * 총 중량은 5lb(약 2.27kg) 내외일 것. * 반동을 최대한 줄일 것. * 300야드(약 270m)에서도 명중할 것. * 사수가 1분당 15발의 속도로 150발을 쏠 때까지 심각한 고장이 발생해서는 안됨. * 상자형 [[탄창]]을 사용해야 함. 1941년 5월에 윈체스터로부터 탄약 개발이 완성되자 상술된 조건을 만족하는 참여 기종들의 성능을 비교하는 1차 테스트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2개 업체가 탈락하고 오토 오드넌스, 새비지, 벤딕스, 콜트, 해링턴&리처드슨, [[스프링필드 조병창]], 우드헐 등 7개 업체만 남아 테스트를 받았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스프링필드 조병창의 [[https://www.forgottenweapons.com/light-rifle-program/garand-carbine/|개런드 카빈]]이 가장 유력했었다.[* 개런드 카빈은 성능이 뛰어났으나 상부에서 급탄한다는 단점이 있어 하부 급탄 방식으로 개량했지만, 이 과정에서 중량이 무거워졌고 신뢰성이 감소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avid_m._williams 0.jpg|width=100%]]}}} || || 데이비드 마셜 윌리엄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ioi7D6ce_34)]}}}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V8dt5V1e_bM)]}}}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FqVQk7z7gYE)]}}}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IWrJ8DSguEM)]}}} || ||<-2> [[Forgotten Weapons]]의 콜트 M1929(좌상) / 윈체스터 G30(우상) / 윈체스터 G30M(좌하) / 윈체스터 M2(우하) 리뷰 영상 || 한편 윈체스터 사에서는 [[존 브라우닝]]의 이복동생인 조나단 에드먼드 브라우닝(Jonathan Edmund Browning, 통칭 에드 브라우닝)이 미 육군 제식 반자동소총 사업에 제출했다가 탈락한 콜트 M1929를 작동 방식을 반동 이용식에서 튜브형 가스 피스톤 방식으로 변경하는 등 재설계를 거친 G30을 개발했다. 에드 브라우닝 사후, 뒤를 이어 고용된 데이비드 마셜 윌리엄스(David Marshall Williams) G30의 설계안을 기반으로 기존의 튜브형 가스 피스톤을 쇼트 스트로크 가스 피스톤 방식으로 변경한 개량형 G30M을 개발하여 미 해병대 제식 반자동소총 사업에 제출했으나, 이물질 유입에 약한 데다 신뢰성이 떨어지는 단점으로 인해 개런드에 패배했다.[* 이후 M1 카빈이 제식화되자, M1 카빈의 설계를 반영한 개량형인 G30R이 개발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자동소총형인 WAR(Winchester Automatic Rifle)이 개발되었으나 종전으로 인해 채택되지 못했다.] 이후 노리쇠 작동 방식을 기존의 틸팅 볼트에서 개런드식 회전 노리쇠로 변경한 M2를 개발했다. 같은 해 9월에 시행된 2차 테스트에 탄약을 개발한 윈체스터 사도 참여 결정을 내리면서 이 개량형 M2를 기반으로 한 카빈 시제품을 제출했고, 15일 간의 심사를 거쳐 스프링필드 조병창, 터너 사, 라이징 사의 경쟁 기종들을 모두 제치고 M1 카빈의 제식명을 획득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년 12월 [[진주만 공습]]을 당하기 직전 [[미 해군]], [[미 해병대]]에서도 약 350,000정의 계약이 맺어지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1carbine_iwojima.jpg|width=100%]]}}} || || 태평양 전선에서의 M1 카빈을 든 미군 || 뒤이은 1942년에는 [[공수부대]]의 요청을 받아 [[개머리판]]이 철제 접이식으로 바뀌어 휴대성이 높아진 M1A1과 함께 다양한 업체에서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44년에는 자동발사 기능을 추가하려는 시도가 이어지면서 [[GM]] 산하의 인랜드 사의 프레드릭 샘슨(Fredrick Sampson)와 폴 해미쉬(Paul Hamish)가 개발한 T17 자동발사 부품을 적용시킨 T4가 동년 10월에 M2 카빈, [[야간투시경]] 부착형 M3 카빈의 제식명을 받아 [[일본]] [[오키나와]] 전역에서 운용되었다. 1945년 9월 2일 종전 선언과 함께 생산이 곧바로 중단되었으며, 기존 M1, M1A1 분량들은 30발 탄창 호환, 자동발사 기능 등이 추가되는 등의 [[오버홀]] 과정을 거쳤는데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에서 분당 750발이라는 빠른 발사속도(현대전에서는 보통의 발사속도이지만)와 복잡한 부품으로 인한 신뢰성 부족을 경험하면서 제기된 신형 제식소총으로 개발된 [[M14 소총]]에게 대체되면서 대부분은 예비 물자로 전환되거나 폐기되는 수순을 밟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1carbine_vietnam 0.jpg|width=100%]]}}} || || 베트남전에서의 M1 카빈 || 하지만 1960년 초반에 개시된 민간인 사격술 사업(Civilian Marksmanship Program)의 일환으로 약 250,000정이 민수용으로 풀리면서 다양한 업체에서의 복제품들이 쏟아지거나 [[영화]] 등에서 대거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1970년에 이르기까지 [[미군]]에서의 공식 퇴역은 이루어지지 않고 [[베트남 전쟁]]은 물론, 그 이후의 [[미합중국 공군|미 공군]] 경비대 등에서의 운용이 계속 이어지기도 했다. 이후 M1, M2, M3 카빈의 명칭과 위치는 후속 화기인 [[M4 카빈]]이 계승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